2013.04.14 23:51

그 이야기 들었어?”

 

무슨 이야기?”

 

옆 나라 토다 왕국과 전쟁이 벌어질 거라는 이야기 말이야.”

 

예끼, 이 사람아! 요즘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는가?”

 

레일린 왕국 사람들은 요즘 모였다 하면 전쟁 이야기뿐이었다.

 

단순히 뜬소문이라면 금방 가라앉았겠지만 토다 왕국에서 거듭 무력도발을 해 온다는 소식이

 

공공연히 알려진 상황에서 퍼진 소문이라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전쟁이 벌어질 거라는 소문은 포트 영지라고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아빠. 진짜 전쟁이 벌어질까?”

 

아이시카의 물음에 가이터가 찜찜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 거의 확실할 거야. 요즘 사냥꾼들이 점점 안 보이지?”

 

.”

 

안 보이는 사냥꾼들 대부분은 전쟁에 투입될 궁수로 차출된 거야.”

 

진짜?”

 

. 토다 왕국이 좀 작거든. 그래서 우리가 무조건 이긴다고 생각하고 앞다투어 병력을 투입한대.”

 

우리도 끌려가는 것 아냐?”

 

강제로 끌고 가진 않는다던데? 지원자에 한해서 직업 병사와 비슷한 수준의 보수를 지급하면서 데리고 간대.”

 

그래? 그럼 우리는 굳이 갈 필요는 없네?”

 

그렇지.”

 

부자지간에 무슨 역적모의를 하느라 그렇게 둘이서만 수군거리는 거야?”

 

앞서 가던 수지가 뒤쳐져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시카와 가이터를 수상하다는 듯한 눈으로 흘겨보며 물었다.

 

역적모의라니! 그런 거 없어!”

 

가이터가 억울하다는 듯 외쳤지만 수지의 의심스럽다는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아이시카가 나섰다.

 

이러다가 늦겠어요! 얼른 가요!”

 

아이시카는 수지의 팔을 잡고 아카데미가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그래!”

 

가이터도 얼른 수지의 팔을 잡고 아이시카를 거들었다.

 

수지는 못이기는 척 표정을 풀고 아이시카와 가이터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가이터의 말대로 강제로 병사를 끌어 모아야 할 정도로 강한 나라와 전쟁이 난 게 아니었던 점도 있지만,

 

영주인 데른이 욕심이 없었던 점도 있었다.

 

만약 데른이 욕심이 많은 영주였다면 전쟁을 공을 세울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영지민들을 박박 긁어모아서 전쟁에 투입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영지가 많았다.

 

하지만 데른은 영지민들을 희생시킬 생각이 없었기에 영지 내의 직업 병사들 중 일부만 보내기로 결정했고,

 

덕분에 포트 영지의 영지민들은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아버지! 이건 좋은 기회라구요!”

 

어제까지는 말이다.

 

로날드! 네가 중앙에 진출하는 걸 말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때문에 죄 없는 영지민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

 

공을 세우고 싶거든 파견하기로 결정한 병사들만으로 세워라!”

 

고작 300명으로 무슨 공을 세우라는 말씀이십니까?”

 

싫으면 말거라. 아니, 말이 나온 김에 지휘관을 다른 기사로 임명하마.

 

공을 세우려고 무리하게 나서지만 않는다면 300명의 병사가 모두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무리를 했다간 300명의 병사는 그대로 몰살이다.

 

네 성격상 공을 세우려고 나설 건 뻔하니, 차라리 널 여기 붙잡아 두고 다른 기사를 지휘관으로 보내는 게 나을 것 같구나.”

 

데른의 차가운 말에 로날드는 입술을 짓씹으며 입을 다물었다.

 

예전 같았으면 로날드가 말하는 대로 들어줬을 데른이었지만

 

로날드의 행동이 점점 더 개망나니가 되어가자 보다 못해서 요즘은 다소 엄하게 대했다.

 

그 덕분에 로날드의 개망나니짓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는 법.

 

개망나니짓을 하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데른이 알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일 뿐이었다.

 

오히려 데른 모르게 나쁜 짓을 하고 다니느라 영지민들만 더 죽어났다.

 

로날드가 물러가지도 않고 입술만 씹고 있자 데른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후우……. 그럼 좋다. 너에게 기회를 주마.”

 

데른의 말에 로날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데른은 로날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방금 말한 기회에 대해서 설명했다.

 

내가 처음에 보내기로 했던 병사들과 기사들은 일단 보류해두고,

 

영지민들에게 너를 따라서 전쟁터로 갈 사람을 모집한다고 전하겠다.

 

모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데리고 네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모이지 않는다면 너도 전쟁터에 갈 생각은 하지 마라. 어떠냐?”

 

로날드는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데른이 말을 꺼낸 이상

 

그 이외에는 선택지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네가 직접 영지민들을 만나서 그들과 이야기를 해 보고 조건을 제시해서 설득해도 좋다.

 

, 어떤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한다거나 병사들을 동원해 강제로 모았다가는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데른의 엄포에 로날드는 대답도 하지 않고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집무실 안은 데른의 한숨소리로 가득 찼다.

 

! 엄마! 아빠!”

 

아카데미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세르가픽이 달려왔다.

 

아이시카가 세르가픽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물었다.

 

따로 나와도 돼?”

 

. 아직 시작 안 했어.”

 

불과 한 시간 전까지 같이 있었으면서도 세르가픽은 아이시카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재잘거렸다.

 

그때, 학생들은 모두 모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세르가픽은 학생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하면서 말했다.

 

가족들은 저 쪽에서 보면 된대. 나중에 봐.”

 

.”

 

셋은 세르가픽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세르가픽이 말했던 곳으로 향했다.

 

그 곳에는 먼저 도착한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셋은 어쩔 수 없이 옆쪽에 서서 졸업식을 구경했다.

 

학생들에게 그동안 수고했다는 말을 하고, 졸업을 했다는 증서를 나누어 주는 간단하기 그지없는 식이었지만

 

아카데미와는 인연이 없었던 수지와 가이터에게는 꽤나 신기한 광경이었다.

 

마음이 잔뜩 들떠있다는 게 옆에 있는 아이시카에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아이시카는 작은 목소리로 진정하라고 몇 번이나 말을 했지만 그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둘 다 감정정도는 억누를 줄 알았기에 눈에 보일 정도로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이시카에게는 조마조마한, 가이터와 수지에게는 두근두근한 졸업식이 모두 끝나고

 

졸업증을 받은 학생들은 흩어져서 가족들에게로 돌아갔다.

 

세르가픽은 싱글벙글하며 졸업장을 자랑스럽게 내밀었고, 아이시카와 가이터, 수지는 세르가픽을 대견해하며 칭찬해 주었다.

 

수지는 슬쩍 눈물까지 흘렸다.

 

졸업한 학생들이 가족들과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조금 전까지 학생들이 서서 졸업식을 하던 곳에는 사람들이 몰려나와 기다란 테이블을 늘어놓고 요리를 날랐다.

 

준비가 다 되자 준비를 하던 사람들 중 한 명이 졸업생들과 가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파티 준비가 끝났습니다! 가서 드시면 됩니다!”

 

그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학교 측에서 파티를 준비해 준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기분 좋은 표정으로 음식이 차려진 곳으로 향했다.

 

아이시카와 가이터, 수지도 세르가픽과 함께 테이블로 향했다.

 

아이시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어라? 의자는 왜 없지?”

 

그러자 세르가픽이 허리에 손을 척하니 얹고는 설명을 해 주었다.

 

이런 식으로 서서 먹고 싶은 음식을 덜어서 먹는 형식의 파티를 스탠딩 뷔페 파티라고 해.

 

격식이나 공간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파티야.

 

그리고 의자가 아예 없지는 않아. 저기 보면 앉아서 먹을 수 있도록 의자도 놔뒀잖아.”

 

, 그런 거야? 이야~ 똑똑한데?”

 

에헴.”

 

아이시카가 똑똑하다고 추켜세워 주자 세르가픽은 가슴을 쭉 펴며 헛기침을 했다.

 

아이시카와 같은 점을 궁금해하던 가이터와 수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르가픽은 접시와 포크를 한 손에 든 채 아이시카의 손을 잡아끌었다.

 

! 저거 먹으러 가자!”

 

알았어. 엄마, 아빠. 잠깐 다녀올게요.”

 

그래.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다녀 와.”

 

나중에 끝나면 아카데미 입구에서 보자.”

 

.”

 

아이시카는 세르가픽에게 끌려서 순식간에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덕분에 가이터와 수지는 오붓하게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배가 찬 가이터와 수지가 대화를 하며 느긋하게 디저트를 즐기고 있는데, 누군가가 가이터에게 알은체를 해왔다.

 

가이터씨 맞으시죠?”

 

. 그런데 누구시죠?”

 

저는 장사를 하는 세미아라고 합니다. 영주님과 거래하시기 전까지 오크 가죽을 파시던 상점 있죠? 그게 제 소유입니다.”

 

~ 그러셨군요. 반갑습니다.”

 

가이터가 인사를 건네자 주변에서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이 인사를 해왔다.

 

가이터는 당황한 표정으로 일일이 인사를 해 주었다.

 

폭풍과도 같은 인사세례가 끝나자 맨 처음 말을 걸어왔던 세미아가 말했다.

 

마을의 유명 인사인 가이터씨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유명 인사요? 제가요?”

 

가이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가이터의 표정에 세미아가 설명을 해 주었다.

 

수십 명이 몰려가서도 왕왕 실패하는 오크 사냥을, 아드님과 단 둘이서 계속 성공하시니 유명할 수밖에요.”

 

그런 가요?”

 

세미아의 설명대로 아이시카와 가이터는 마을에서 나름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둘 다 워낙 그런 쪽으로는 눈치가 없어서 전혀 몰랐던 것이었다.

 

거기다 사냥이 끝나면 가끔씩 술을 마시는 것 말고는 딱히 성을 돌아다니거나 하지도 않았기에

 

성에 사는 사람들과 친해지지도 않았었다.

 

그러던 차에 가이터가 나타났으니 다들 몰려드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가이터는 처음에는 조금 쑥스러워 했지만 금방 사람들과 친해져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지는 장을 보느라 성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주변에 사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기에

 

가이터보다는 훨씬 아는 사람이 많았고, 덕분에 훨씬 수월하게 다른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관심 집중을 받은 것은 아이시카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시카씨 맞죠?”

 

? .”

 

맞대!”

 

꺄악!”

 

어떻게 해!”

 

아이시카가 맞다고 대답을 하는 순간 주변에 있던 젊은 여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세르가픽의 입가에 묻은 음식을 닦아주고 있던 아이시카는 놀라서 냅킨을 세르가픽의 입 안으로 집어넣어 버렸다.

 

에페페펫!”

 

! 미안해!”

 

세르가픽이 입에 들어간 냅킨을 뱉어내자 아이시카가가 얼른 사과했다.

 

아이시카가 땅에 떨어진 냅킨을 대충 털어서 테이블에 올려놓는 동안,

 

세르가픽은 뚱한 표정으로 자신과 아이시카를 포위하다시피 둘러싸고 있는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여자들은 다시 한 번 자지러졌다.

 

귀여워!”

 

형제지만 둘은 생김새가 극과 극이었다.

 

전체적인 생김새나 이목구비는 상당히 닮았지만 아이시카는 선이 약간 굵은 남자답게 생긴 얼굴이었고,

 

세르가픽은 선이 가늘고 예쁘장하게 생긴 중성적인 얼굴이었다.

 

둘 다 한 번 보면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잘 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평균은 훨씬 웃도는 얼굴인데다가 분위기만 다르지 상당히 닮았고,

 

사이좋게 웃으며 달라붙어 있으니 여자들이 보기에는 가히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아이시카가 물었지만 주변을 둘러싼 여자들은 대답은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몸을 배배 꼬았다.

 

대답이 없자 아이시카가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세르가픽이 아이시카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 저거 먹으러 가자!”

 

? 그래.”

 

아이시카는 세르가픽에게 끌려서 여자들의 포위를 벗어났다.

 

멀어져가는 둘의 뒷모습에 여자들은 아쉬워하긴 했지만 따라가지는 않았다.

 

세르가픽이 자신들을 경계하고 있다는 게 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방해하는 모습이 얄미울 법도 하건만 여자들은 그런 세르가픽의 모습조차 귀엽게 느껴졌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형에게 들러붙으려는 날파리들을 퇴치한 세르가픽은 싱글벙글하며 다시 음식을 먹었다.

 

그런 세르가픽의 속내를 대충 짐작한 아이시카는 쓰게 웃으며 세르가픽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파티가 끝날 무렵이 되자 조금 전 졸업식에서 훈화를 했던 학장이 말했다.

 

파티는 이제 끝났습니다. 조심해서 돌아가시고, 상급반에서도 다들 공부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

 

상급반?”

 

졸업을 했으니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던 아이시카와 가이터, 수지는 상급반이라는 소리에 놀라서 학장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썰물처럼 아카데미를 빠져나가는 중이었고, 학장도 단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다.

 

세르가픽,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

 

아이시카는 세르가픽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학장에게 달려갔다.

 

학장님!”

 

? 무슨 일이시죠?”

 

뭐 좀 여쭤보려고 하는데요. 조금 전에 말씀하신 상급반이라는 게 뭐죠?”

 

, 모르셨나요? 지금 한 졸업식은 아카데미 기초반의 졸업식입니다.

 

기초반에서는 말 그대로 가장 기본적인 것에 배우는 과정입니다.

 

관료가 되기 위한 전문적인 것은 상급반에서부터 본격적으로 가르칩니다.”

 

그럼 상급반까지 졸업을 하면 관료가 되는 건가요?”

 

아뇨. 상급반에서는 3년간 전문적인 내용을 전반적으로 가르치면서 학생들 개개인의 적성에 따라 반을 나눕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고급반에서 2년간 각자의 적성에 따른 심화과정을 배우고

 

현직 관료들 밑으로 들어가 실습을 하면서 실무를 익힙니다.

 

그 과정까지 끝나야 비로소 아카데미를 완전히 졸업해서 관료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학비는 얼마나 들어가나요?”

 

상급반에서는 학기당 약 300골드 정도, 고급반에서는 학기당 약 500골드 정도의 돈이 듭니다. 물론 교재비는 별도입니다.”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아카데미에서 허드렛일을 한다던 여자는 상급반이나 고급반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기에 아이시카는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학장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원래는 3년간 전문과정만 배우면 됐었습니다. 학비는 학기당 150~200골드정도였고요.

 

그런데 얼마 전에 아카데미를 소영주님께서 맡으시면서 교육과정과 학비에 변동이 생겼습니다.

 

변동이 생기면 연락을 드리는 게 원칙인데, 소영주님께서 연락을 하지 말라고 하셔서 연락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학장의 설명에 아이시카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러나 아이시카는 로날드를 욕하기 보다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필요한 금액을 계산했다.

 

‘600골드씩 3년이면 1800골드. 1000골드씩 2년이면 2000골드.

 

책값은 별도라고 했으니 졸업 하려면 적어도 4000골드는 더 있어야 한다는 소리잖아?’

 

영주가 수고비로 줬던 돈이 남아있긴 했지만 2천 골드가 조금 못 됐다.

 

졸업을 하고도 남을 정도의 돈이라고 생각했기에 오크 사냥을 그만뒀기 때문이었다.

 

로날드가 농간을 부리지만 않았으면 전문과정도 충분히 졸업할 수 있는 금액이었지만

 

이제는 상급반도 간신히 다닐 수 있을 금액이 되어버렸다.

 

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시카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세르가픽이 기다리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학장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런 아이시카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 무슨 일 있어?”

 

학장의 이야기로 받은 쇼크가 아직 가시질 않아서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던 아이시카의 얼굴을 보고 세르가픽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이시카는 얼른 표정을 풀고 얼버무렸다.

 

? 아냐, 아무것도. 너무 많이 먹어서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래.”

 

그래? 사실 나도 속이 좀 안 좋아. 에헤헤. 무지 맛있었어. 형은?”

 

나도 맛있었어. 그러니 속이 안 좋을 정도로 먹지.”

 

맞아, 맞아.”

 

또 먹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치?”

 

! !”

 

세르가픽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시카는 세르가픽을 데리고 아카데미 입구로 향했다.

 

입구에는 수지와 가이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상급반이라는 소리에 둘 역시 학장에게 물으러 가려고 했지만 아이시카가 먼저 뛰어가는 모습을 보았기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시카, 무슨 일…….”

 

가이터가 무슨 일인지를 물어보려고 하자 아이시카가 검지를 세워 입술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가이터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형이 너무 많이 먹어서 속이 안 좋대.”

 

저런……. 적당히 좀 먹지.”

 

아하하. 음식이 무지 맛있더라구요.”

 

세르가픽이 무거운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셋은 너스레를 떨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끼리 조촐하게 축하 파티를 하고 난 뒤, 세르가픽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세르가픽이 잠자리에 든 것을 확인한 셋은 거실에 모였다.

 

아이시카, 무슨 일이야?”

 

아이시카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가이터가 물었다.

 

아이시카는 얼굴을 와락 구긴 채 한숨을 푹푹 내쉬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아이시카가 진심으로 분노한 모습은 생전 처음 보았기에 수지와 가이터조차 바짝 긴장을 했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아이시카가 조금 전 학장에게 들었던 것들을 둘에게 말해주었다.

 

아이시카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가이터는 아이시카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구긴 채로 이를 갈았고,

 

수지는 멍한 표정으로 하염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수지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쩌긴. 나랑 이 녀석이 이 악물고 돈을 벌어야지. 그래도 남은 돈이면 상급반 다니는 3년은 버틸 수 있잖아.”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왜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거지?”

 

아마 다른 사람들은 우리와는 다르게 전문과정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러니 상급반이라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거고. 소영주님도 그걸 이용하기 위해서 알리지 말라고 한 걸 거야.”

 

로날드 그 개새끼가……!”

 

참다못한 아이시카가 욕을 했지만 수지와 가이터는 아이시카를 나무라거나 말리지 않았다.

 

둘의 마음도 아이시카와 별로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지는 이내 펑펑 울기 시작했고, 아이시카와 가이터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이를 갈았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분을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다.

 

졸업식을 했기에 학교에 가지 않는 세르가픽이 집에 있느라 아이시카와 가이터, 수지는 억지로 밝은 분위기를 연출해야만 했다.

 

특히 수지는 하루 종일 세르가픽과 집에 있어야 했기에 무의식중에라도 안타까움이나 슬픔이 드러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에 반해 아이시카와 가이터는 날마다 사냥을 다녀야만 했기에 그나마 조금 편했다.

 

하지만 둘도 결코 편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육체적으로는 수지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다.

 

1년에 천 골드라는, 평민의 입장에서는 꿈과 같은 금액을 마련하려다 보니 잠시도 쉴 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루에도 네댓 번씩 오크 무리를 잡다 보니 며칠 만에 오크가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

 

오크를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가 되어 가이터가 트롤에 도전을 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즈음, 집으로 병사들이 찾아왔다.

 

-똑똑똑

 

누구세요?”

 

성에서 나왔습니다.”

 

잠시만요.”

 

아이시카가 문을 열자 피곤에 찌든 표정의 병사들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영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영주님께서요? 저를요?”

 

가이터씨도 같이요.”

 

저희를 왜 찾으시는지 혹시 아시나요?”

 

그건 저희도 잘…….”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아빠 모시고 나올게요. 엄마! 시원한 물 몇 잔만 갖다 주세요!”

 

고맙습니다.”

 

아이시카의 배려에 병사들은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정원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다.

 

수지가 물을 가져다주는 동안 아이시카는 가이터에게 병사들이 찾아왔다는 이야기와 데른이 자신들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이시카의 이야기를 들은 가이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성으로 갈 준비를 했다.

 

그러자 세르가픽이 달려와서 아이시카의 허리에 매달리며 말했다.

 

나도 갈래! 나도 가고 싶어!”

 

안 돼. 영주님께서 부르신 건 아빠랑 나야.”

 

싫어! 나도 갈 거야! 으아아아아앙!”

 

세르가픽이 울음을 터뜨리자 아이시카가 난감한 표정으로 가이터를 바라보았다. 가이터 역시 난감한 표정이었다.

 

세르가픽이 계속 칭얼거리며 울자 아이시카는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아……. 알았어. 그럼 병사님들께 여쭤보고 올게. 너도 같이 가도 상관없다고 하시면 같이 가자.”

 

…….”

 

이것도 싫으면 나도 싫어. 묶어놓고라도 아빠랑 나랑 둘만 다녀올 거야.”

 

우우……. 알았어.”

 

아이시카의 으름장에 세르가픽은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시카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병사들에게 물었다.

 

동생이 꼭 같이 가고 싶다고 하는데, 혹시 동생도 같이 가도 되나요?”

 

병사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잠시 수군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집으로 들어온 아이시카는 세르가픽에게 옷을 입히며 영주성에 가면 주의할 점을 거듭 강조해서 말해주었다.

 

하지만 기대감에 부풀어오른 세르가픽의 표정으로 보아서는 제대로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준비를 모두 끝낸 아이시카와 가이터는 세르가픽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준비는 다 끝나셨습니까?”

 

.”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고 잠시나마 휴식을 취한 덕분인지 병사들의 얼굴은 약간이지만 밝아져 있었다.

 

병사들은 아이시카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셋을 데리고 성으로 향했다.

 

성에 도착한 셋은 집사장을 따라 데른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안에는 데른은 없고 여러 명의 남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 중에는 아이시카와 가이터가 아는 사냥꾼들도 있었다. 가이터는 사냥꾼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우리도 모르겠어.”

 

영주님께서 부르신다고 해서 온 거야.”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었지만 그들 역시 이유를 몰랐다. 결국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데른이 뚱한 표정의 로날드와 함께 집무실로 들어왔다.

 

집무실 안에 있던 모두는 즉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세르가픽은 주변 사람들이 모두 엎드리자 얼른 따라서 엎드렸다.

 

데른은 책상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앉으며 집무실 안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했다.

 

다들 내가 부른 이유가 궁금할 거다. 전쟁에 대한 소문은 모두 들었겠지? 그 소문은 사실이다.”

 

대충 짐작은 했지만 데른이 직접 사실이라고 말하자 약간의 웅성거림이 일었다.

 

그러나 그 웅성거림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집무실 안이 조용해지자 데른은 그들을 부른 이유를 마저 설명해 주었다.

 

나는 원래 영지의 병사 300명과 기사 10명만을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로날드가 이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싶다고 해서 기회를 주기로 했다.

 

영지민들 중에 자발적으로 로날드를 따라서 전쟁터로 가고 싶은 자가 있다면 그들을 데리고 가서 공을 세우라고 말이다.

 

하지만 모든 영지민에게 이야기를 전할 수는 없었다.

 

되도록 전쟁으로 인한 여파가 영지민들에게 퍼지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움이 될 만한 영지민들에게 먼저 묻기로 했다.

 

너희들 중 자진해서 로날드를 따라 전쟁터로 갈 사람이 있느냐?”

 

데른의 물음에도 반응을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로날드가 나섰다.

 

만약 나를 따라 전쟁터로 간다면, 내가 들어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너희들이 바라는 것들을 하나씩 들어주마.

 

어차피 확실하게 이길 전쟁이다.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운다면 우리 영지의 이름도 널리 알려질 것이고, 너희들도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다.”

 

로날드가 직접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가겠다고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로날드가 계속 달콤한 말로 같이 가자는 이야기를 했지만 그런 반응은 여전했다.

 

그 동안 아이시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가이터에게 속삭였다.

 

아빠.”

 

?”

 

세르가픽의 학비를 면제해 달라고 하고 내가 전쟁터로 가는 건 어때?”

 

? 너 미쳤냐?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하지만 어차피 이길 거라며? 그럼 슬쩍 끼여서 생색이라도 내는 게 낫지 않아?”

 

우리 같은 평민들은 가봐야 화살받이로밖에 안 쓰여. 그걸 알고 하는 말이야?”

 

그 정도는 나도 알아. 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안 돼! 수지가 허락할 것 같아?”

 

일단 말이라도 해보는 건 어때?”

 

안 돼. 그냥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 네가 그렇게 덜컥 저질러버리면

 

나중에 수지한테 안 말리고 뭐 했냐고 바가지 긁히는 내 입장도 생각 좀 하란 말이야.”

 

알았어.”

 

가이터가 윽박지르자 아이시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되는 설득에도 아무도 반응이 없자 로날드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러나 데른이 보는 앞에서 성질대로 행동할 수는 없기에 꾹 눌러 참았다.

 

그런 로날드의 모습에 데른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많이 당황스러운 듯하군.

 

며칠 시간을 주마. 충분히 생각을 해 보고 마음을 결정하면 나를 찾아와라.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마. 거부한다고 해도 그 어떤 불이익도 없을 것이다. 다들 이만 물러가라.”

 

로날드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긴 했지만 순순히 수긍했고, 불려온 사람들은 모두들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시카는 세르가픽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가이터와 수지를 불렀다.

 

영문을 모르는 수지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이유를 아는 가이터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돼.”

 

이야기나 좀 듣고 반대를 하지?”

 

뭐야? 무슨 일인데?”

 

갑작스러운 가이터의 행동에 더욱 영문을 모르게 된 수지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아이시카는 조금 전 영주성에서 들었던 이야기와 자신이 생각한 바를 설명했다.

 

수지와 함께 아이시카의 이야기를 듣던 가이터는 수지가 화를 내거나 울음을 터뜨릴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수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수지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위험하지 않아?”

 

? 어어……. 물론 전쟁터니까 어느 정도 위험이야 있겠지만

 

전쟁을 벌이는 왕국이 워낙 작아서 위험할 일은 거의 없을 거래.

 

요즘 오크가 씨가 마르다시피 해서 까딱 잘못하면 트롤이라도 잡아야 할 판인데, 그거에 비하면 훨씬 안전하지 뭐.”

 

예상외로 수지가 담담한 목소리로 묻자 오히려 아이시카가 당황해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아이시카의 대답에 수지는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정말로 괜찮겠니?”

 

물론이지.”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흑흑흑.”

 

수지가 담담할 리가 없었다. 담담하기는커녕 당장이라도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세르가픽이 잠에서 깰까봐 그럴 수 없었다.

 

로날드가 원망스러워서, 세르가픽을 위해 자진해서 전쟁터로 가려는 아이시카의 마음이 갸륵해서,

 

그리고 그걸 말릴 수 없는 자신들의 처지가 슬프고 미안해서 수지는 소리죽여 오열했다.

 

한참을 울던 수지가 지쳐서 잠이 들자 가이터는 수지를 안아서 침실에 눕혀 주었다.

 

그리고 술병과 잔 두 개를 들고 와서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 잔 하자.”

 

. 근데 아까는 반대하더니 이젠 안 말려?”

 

내가 안 된다고 했던 건 수지가 반대할까봐 그랬던 거야.

 

위험한 데 보내기 싫은 건 나도 수지랑 마찬가지지만 넌 이제 18살이잖아.

 

다 컸으니 나쁜 짓만 아니라면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살아가야지.”

 

가이터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잔과 아이시카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

 

가볍게 건배를 한 뒤 둘은 술을 쭉 들이켰다.

 

꽤나 큰 병이었지만 두 부자는 안주도 없이 권커니 잣거니 하며 모두 비웠다.

 

그리고 술에 취해서 소파에 드러누워 버렸다.

 

잠이 들려는 아이시카의 귀에 가이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

 

?”

 

절대 죽지 마라.”

 

알았어.”

 

그 대답을 끝으로 아이시카는 곯아떨어졌고, 가이터는 복잡한 눈빛으로 아이시카를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술을 많이 마신 탓에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잠에서 깬 아이시카는 숙취에 괴로워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이제 일어났냐?”

 

괜찮니?”

 

! 얼른 와서 밥 먹어!”

 

이미 식탁에 앉아서 점심을 먹고 있던 가이터와 수지, 세르가픽은 식당으로 들어온 아이시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시카는 비틀거리며 자기 자리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그러나 속이 좋지 않아서인지 몇 술 뜨지도 못하고 물만 마셨다.

 

스프라도 좀 끓여줄까?”

 

걱정스러운 수지의 물음에 아이시카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젓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잠시 누워서 쉬는데,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똑똑

 

들어와도 돼.”

 

문을 두드린 사람은 가이터였다.

 

언제쯤 갈 생각이냐?”

 

가이터의 물음에 아이시카는 누운 채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있다가 저녁때 쯤 가지 뭐.”

 

그래. 그거야 뭐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네가 알아서 하면 될 테고……. 그보다 세르가픽에겐 뭐라고 설명할 거냐?”

 

누운 채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아이시카는 가이터의 말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크다면 가장 큰 고비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아이시카는 누운 채로 말없이 한참을 고민했다.

 

가이터는 아무 말 없이 아이시카가 결정을 내리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고민 끝에 아이시카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생각이 바뀌었어. 지금 당장 영주님 성에 들렀다가 언제쯤 출발하는 지 알아보고

 

그 동안 세르가픽이랑 좀 놀아줘야겠어. 요즘 사냥만 다니느라 거의 못 놀아줬잖아.”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충격 받지 않도록 잘 설명해 줘야 한다.”

 

. 걱정하지 마.”

 

돈은 있냐?”

 

약간 있…….”

 

-

 

있다고 대답하려는 아이시카의 어깨로 무언가가 날아와서 부딪혔다. 그것은 작은 가죽 주머니였다.

 

이게 뭐야?”

 

열어 봐.”

 

주머니를 열자, 그 안에는 금화가 들어있었다.

 

부족하면 말해. 더 줄 테니까.”

 

.”

 

지금 바로 출발할 거지? 얼른 씻고 나와.”

 

알았어.”

 

아이시카는 욕실로 들어가서 몸을 씻었다.

 

다 씻고 옷까지 갈아입은 아이시카가 욕실에서 나오자, 문 앞에 세르가픽이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아이시카는 설마…….’하는 심정으로 소파에 앉아있는 가이터를 바라보았다.

 

가이터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수지한테 네가 지금 영주님을 뵈러 갔다 온다고 말했는데 그걸 들어버렸어.

 

하도 따라가겠다고 해서 너한테 물어보라고 했어.”

 

나도 같이 갈래!”

 

데리고 가지 않으면 울어버릴 테야!’라는 의사를 온 얼굴로 피력하는 세르가픽의 모습에 아이시카는 옅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알았어. 같이 가자. 대신, 얼른 씻고 옷 갈아입고 나와.”

 

!”

 

세르가픽인 큰 소리로 대답하고는 자기 방에 가서 갈아입을 옷을 챙긴 뒤 욕실로 들어갔다.

 

아이시카는 가이터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설거지를 끝내고 거실로 나오던 수지가 욕실을 가리키며 물었다.

 

괜찮겠니?”

 

별 일이야 있겠어요? 성에서는 무조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되죠.

 

그리고 갔다가 오는 길에 조금 놀다가 저녁 먹고 올게요.”

 

그러렴. 그런데 만약에 영주님께서 아카데미를 공짜로 다니게 해 주는 건 안 된다고 하시면 어쩌지?”

 

그럼 안 가는 거죠. 그리고 아마 들어주실 거예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

 

……. 제가 돈을 달라고 한 게 아니니까요.

 

받아야 할 돈을 못 받는 셈이긴 하지만 그래도 직접적인 마이너스는 아니잖아요.

 

저희가 아카데미를 안 다니면 아예 수익으로 칠 수도 없는 거구요.

 

수익이라고 확정되지도 않은 것 때문에 공을 세우기 위한 영지민 징집의 물꼬를 터줄 사람의 조건을 거부하진 못할 걸요?”

 

그렇긴 하다만…….”

 

잘 될 거예요.”

 

준비 끝났어!”

 

뒤에서 들려오는 세르가픽의 목소리에 아이시카는 몸을 일으켰다.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라.”

 

너무 늦지 말고.”

 

네에!”

 

세르가픽은 쏜살같이 나가버렸고, 아이시카는 쓰게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룰루루~.”

 

세르가픽은 영주성으로 가는 내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뭐가 그렇게 즐겁니?”

 

형이랑 오랜만에 같이 나오는 거잖아. 헤헤.”

 

그런가? ……. 하긴, 요즘 아빠랑 내가 좀 바쁘긴 했지.”

 

성에는 뭐하러 가는 거야?”

 

영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가는 거야.”

 

무슨 말?”

 

그건 비밀. 그보다, 뭘 하고 놀지나 생각해 둬. 오랜만에 나왔으니 재밌게 놀고 맛있는 걸로 저녁도 먹고 들어가자.”

 

진짜?”

 

그럼!”

 

와아!”

 

세르가픽은 환호성을 지르며 아이시카의 허리를 껴안았다.

 

아이시카는 슬픈 눈으로 그런 세르가픽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형이랑 한 가지 약속해.”

 

무슨 약속?”

 

성에 가면 무슨 일이 있어도 영주님과 소영주님, 기사님들께 함부로 말 걸지 마.

 

그 분들께서 말을 거시면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하고.

 

그리고 혹시 심한 소리를 들어서 기분이 상하더라도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걸 드러내면 안 돼.

 

그럴 때는 그냥 입 꾹 다물고 고개 숙이고 있어. 알았지?”

 

……. 알았어.”

 

아이시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세르가픽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성에 도착한 아이시카는 입구를 지키는 기사에게 데른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아이시카는 세르가픽의 손을 잡고 하인을 따라 영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로 가는 내내 세르가픽은 신기한 듯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전날도 왔었지만 밤이라서 어두웠기에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똑똑

 

영주님, 아이시카가 영주님을 뵙겠다고 찾아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라.”

 

아이시카와 세르가픽을 집무실까지 안내한 하인은 문을 열어준 뒤 들어가지는 않고 문 옆에 서 있었다.

 

아이시카는 방 안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바닥에 엎드렸다.

 

세르가픽도 아이시카를 따라서 바닥에 엎드렸다.

 

서류를 보고 있던 데른은 서류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어제의 일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어제의 일……? , 그 일 말이냐? 그런데 이야기를 해야 할 대상이 잘못된 것 같지 않으냐?

 

그건 나보다는 로날드와 이야기를 해 봐야 할 일인데.”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저는 영주님께 말씀드리면 되는 줄 알고 그만…….”

 

누구와 이야기하든 상관이야 없지. 일단 로날드를 불러 주마. 여봐라! 로날드를 좀 불러 오너라!”

 

.”

 

문 너머에서 하인의 대답이 들려왔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로날드가 들어왔다.

 

아이시카는 로날드가 들어오자마자 데른에게 부탁했다.

 

이 아이는 잠시 나가 있게 해도 되겠습니까?”

 

? 그러도록 해라.”

 

세르가픽, 잠시만 나가 있어. 나도 금방 나갈 테니까.”

 

.”

 

세르가픽은 데른과 로날드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힌 뒤, 로날드가 데른에게 물었다.

 

아버지, 왜 부르신 거예요?”

 

아이시카가 할 말이 있다고 하더구나.”

 

데른이 아이시카를 가리키며 말했다. 로날드는 바닥에 엎드려 있는 아이시카를 흘끗 쳐다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어제 하셨던 말씀, 아직 유효합니까?”

 

어제 했던 말이라니?”

 

소영주님과 함께 전쟁터로 가면 소영주님께서 들어주실 수 있으신 범위 내에서 바라는 것 한 가지를 들어주신다는 말씀 말입니다.”

 

~ 그거?”

 

로날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면서 데른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사실 그렇게 말하면 다들 하겠다고 나설 것 같아서 한 빈말이었지만

 

데른이 어제 같이 들은 데다 지금도 눈을 부라리고 로날드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로날드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어떤 걸 원하지?”

 

방금 나간 제 동생이 이제 아카데미 상급반에 다니게 됩니다.

 

그런데 상급반부터는 학비가 너무 비싸져서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면제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뭐라고? 상급반? 아카데미에 그런 과정도 있었던가? 그리고, 학비가 비싸다니?”

 

아이시카의 말에 데른이 놀라서 물었다. 로날드는 뜨악한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준 돈도 있고, 너희 부자의 사냥 솜씨라면 학비 정도는 충분히 마련할 수 있을 텐데?”

 

아버지, 그게…….”

 

입 다물어라!”

 

로날드가 어떻게든 사태를 모면하려고 했지만 데른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는 숙이고 있었지만 들리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대충 짐작한 아이시카는

 

낭패한 얼굴로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다.

 

어서 말하지 못할까?”

 

그러나 데른이 화난 목소리로 추궁하자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올해부터 아카데미의 과정이 바뀌고 학비가 올랐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바뀌고, 얼마나 올랐다는 말이냐?”

 

원래는 전문반만 있고 3년간 학기당 200골드정도였는데,

 

올해부터는 상급반과 고급반으로 나뉘어서 상급반은 3년간 학기당 300골드,

 

고급반은 2년간 학기당 500골드를 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올해부터라고? 연락을 받았느냐?”

 

며칠 전 졸업식에서 처음 들었습니다.”

 

로날드!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그게저어…….”

 

수도에 있는 고급 아카데미와 맞먹는 금액이 아니냐!

 

비록 우리 영지가 시골 영지 중에서는 꽤 부유한 편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학비를 부담할 수 있을 정도의 부자는 없다!

 

아카데미를 맡기자마자, 더구나 아카데미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한 마디 통보도 없이 그런 짓을 하다니!

 

아예 아카데미 문을 닫게 하려고 작정했느냐?”

 

단단히 화가 난 데른은 노발대발하며 로날드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그나마 일이 지나치게 커지는 게 두려웠던 아이시카가

 

로날드가 일부러 연락을 하지 말도록 했다는 사실은 쏙 빼 두었기에 꾸중으로 끝날 수가 있었다.

 

한참을 화를 낸 데른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후우……. 넌 그냥 영지에 있거라. 예정대로 병사 300명과 기사 10명만 보낼 것이다.

 

그리고 아카데미 운영도 내가 직접 하겠다.”

 

아주 약간 숨통이 트인다 싶었는데 아이시카 때문에 그게 날아가게 되자

 

로날드는 아이시카를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덕분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이시카는 뒤통수가 따끔거려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잠시 아이시카의 뒤통수를 노려보던 로날드는 데른에게 간청했다.

 

아버지, 제발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

 

그러나 데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로날드를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로날드는 지지 않고 그런 데른의 눈을 바라보면서 거듭 부탁했다.

 

데른은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마. 내가 어제 불렀던 사람들에게 그들이 만족할만한 조건을 제시해서 불러 모아라.

 

이틀을 주겠다. 이틀 후, 병사 500명과 기사 20명을 출발시킬 것이다.

 

그때까지 네가 100명 이상을 모은다면 널 지휘관으로 임명하마.

 

하지만 100명조차 채우지 못한다면 그냥 얌전히 영지에만 있는 거다.”

 

알겠습니다.”

 

로날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데른은 나가보라는 듯 손짓을 했고,

 

로날드는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는 방법으로 자신의 기분을 표현하며 집무실을 나섰다.

 

그런 로날드의 등에 대고 데른이 한 마디 덧붙였다.

 

아이시카와 그 일가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댔다간 정말 크게 혼날 줄 알아라.”

 

-

 

집무실 문이 부서질 듯 닫혔고, 데른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서류를 보려던 데른은 아직까지 바닥에 엎드려있는 아이시카를 보고 쓰게 웃으며 말했다.

 

네 조건은 내가 확실히 들어주마.”

 

감사합니다, 영주님.”

 

로날드 녀석이 활을 쏠 일이 없도록 해 다오.

 

그리고가능하다면 그 녀석을 좀 지켜주길 바란다.”

 

데른이 부탁하는 식으로 말하자 아이시카는 엎드린 채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소영주님을 잘 모시겠습니다.”

 

그래. 만에 하나라도 네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가족들은 내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해 주마.”

 

감사합니다, 영주님.”

 

이만 나가 보거라.”

 

.”

 

나가보라는 데른의 말에 문이 열렸고, 아이시카는 엎드린 채로 집무실을 나섰다.

 

집무실을 나선 아이시카는 다짜고짜 날아온 손에 뺨을 맞고 말았다.

 

-짜악

 

으윽!”

 

-쿠당탕

 

너무 갑작스러웠기에 미처 대응도 하지 못한 아이시카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아이시카가 놀라서 고개를 들자 로날드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아이시카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이시카는 얼른 엎드려서 빌었다.

 

죄송합니다, 소영주님. 저는 당연히 영주님께서 아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시카가 싹싹 빌었지만 로날드는 여전히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리고 아이시카의 뒤통수를 짓밟으려는 듯 발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조금 전 데른의 말이 떠올라서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발을 구르는 것으로 대신했다.

 

심호흡을 해서 분을 조금 가라앉힌 로날드가 차가운 목소리로 아이시카에게 말했다.

 

방금 전 있었던 일은…….”

 

?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제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긴 했습니다만…….”

 

아이시카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로날드는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로날드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아이시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괜찮으세요?”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하인이 아이시카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제 동생이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시나요?”

 

, 동생분이라면 아까 하녀들이 데리고 갔습니다. 아마 주방에 있을 겁니다.”

 

주방이 어딘지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따라 오십시오.”

 

아이시카는 하인을 따라 주방으로 향했다.

 

꺄아아!”

 

귀여워!”

 

주방에서는 하녀들의 비명과 탄성이 어우러진 소리가 연신 튀어나왔다. 아이시카는 쓰게 웃으며 주방문을 열었다.

 

세르가픽.”

 

!”

 

아이시카가 부르자 세르가픽이 힘차게 대답하며 달려왔다.

 

안에서 아쉬움의 한숨이 들려왔기에 아이시카는 다시 쓰게 웃었다.

 

다 끝났어?”

 

. 이제 집에 가자.”

 

아이시카는 세르가픽의 손을 잡고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아이시카를 불렀다.

 

어이! 아이시카라고 했던가?”

 

아이시카는 뒤를 돌아보고는 그 즉시 바닥에 엎드렸다.

 

아이시카를 부른 사람이 로날드였기 때문이었다.

 

세르가픽도 얼른 아이시카 옆에 엎드렸다.

 

아아, 일어나도 돼.”

 

감사합니다, 소영주님.”

 

감사합니다, 소영주님.”

 

아이시카와 세르가픽은 인사를 한 뒤 고개는 여전히 푹 숙인 채 몸을 일으켰다. 로날드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후우……. 아무리 생각해도 평민들이 바라는 것을 모르겠더군. 너라면 혹시 알지 않을까 싶어서 물어보려고 불렀다.”

 

다른 사람들이 바라는 것말씀이십니까?”

 

그래.”

 

아이시카는 어제 보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대부분이 사냥꾼이나 주먹패들이었고, 간간히 전직 용병들도 끼여 있었다.

 

……. 어쩌면…….’

 

잠시 고민하던 아이시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짐작 가는 게 있냐?”

 

제가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을 제시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네가 바라는 것? ~ 아카데미 학비 면제 말이냐?”

 

. 어제 봤던 이들 중 대부분은 아카데미를 다닐 경제적 조건이 되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아카데미 학비 면제를 조건을 제시하면 아이가 있는 자들은 대부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없는 자들은?”

 

……. 영지의 정규 병사로 받아들이는 건 어떻겠습니까?

 

전쟁이 끝나기만 하면 안정된 직장이 생기는 셈이니 아마도 받아들일 겁니다.”

 

둘 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조건이군.”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고민하던 로날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아버지께 말씀드려 봐야겠군.”

 

마음을 정하고 몸을 돌리던 로날드는 걸음을 멈추고 아이시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영지에서 활을 제일 잘 쏜다지? 사실이냐?”

 

조금 쏠 줄 알기는 합니다만, 그냥 영지 사람들이 듣기 좋으라고 추켜세워 주는 말일 뿐입니다.

 

저보다는 소영주님께서 훨씬 더 잘 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로날드가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도 알고 있구나. 어험. 하긴, 너같은 평민이 활을 아무리 잘 쏜다고 해도 귀족들에게 비하겠느냐?”

 

그러믄입죠.”

 

아니에요! 우리 형은 진짜 활 잘 쏴요!”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세르가픽이 발끈해서 로날드를 똑바로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러자 로날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이시카는 당황해서 세르가픽에게 말했다.

 

네가 소영주님의 활솜씨를 못 봐서 그래. 소영주님은 형 같은 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잘 쏘신단다.”

 

아니야! 형이 최고란 말이야!”

 

세르가픽! 너 자꾸 헛소리 할래?”

 

다급해진 아이시카가 언성을 높이며 세르가픽을 윽박질렀다.

 

그러나 세르가픽은 계속 아이시카가 최고라고 바락바락 악을 썼다.

 

그런 세르가픽의 행동에 로날드가 표정을 와락 구기며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

 

아이시카가 세르가픽의 뺨을 때렸다.

 

놀란 세르가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시카를 바라보았다.

 

아이시카는 화난 표정으로 소리쳤다.

 

! 소영주님께 무슨 무례한 행동이야! 형이 그렇게 가르쳤어? ?”

 

……!”

 

당장 소영주님께 사과드려!”

 

아이시카가 계속 윽박지르자 세르가픽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그런 세르가픽의 모습에 아이시카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계속 세르가픽을 윽박질렀다.

 

결국 세르가픽은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앙! 형아 미워! 으아아아앙!”

 

! 당장 그치지 못해? 뭘 잘했다고 울어, 울길!”

 

으아아아아앙!”

 

아이시카가 계속 다그치자 세르가픽은 울면서 성 밖으로 달려가 버렸다.

 

아이시카는 얼른 로날드 앞에 엎드리며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소영주님. 동생 녀석이 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지금까지 활 쏘는 사람을 저밖에 못 봐서 제가 제일이라고 믿는 멍청한 녀석입니다.

 

아는 게 없어서 그런 것이니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크흠. , 무지한 백성을 탓할 수만은 없지. 알았다.”

 

감사합니다.”

 

아까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은 들었지? 이틀 뒤 출발이다. 잊지 말고 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이만 가 봐라.”

 

.”

 

아이시카는 고개는 숙인 채 몸만 일으켜서 뒷걸음질로 성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세르가픽이 달려간 방향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꽤 오래 달렸음에도 세르가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온 영지를 누비며 세르가픽을 찾던 아이시카는 세르가픽이 집으로 갔다는 말에 즉시 집으로 향했다.

 

-벌컥

 

세르가픽 왔어?”

 

그래.”

 

수지가 화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이터 역시 잔뜩 화가 난 표정이었다.

 

세르가픽을 찾느라 온 성을 누빈 덕분에 완전히 지쳐있던 아이시카는 대답을 듣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았다.

 

수지는 그런 아이시카를 노려보며 물었다.

 

형한테 맞았다면서 계속 울다가 조금 전에 지쳐서 잠들었어.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인데 동생한테 손찌검까지 한 거야?”

 

아이시카는 성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아이시카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수지와 가이터는 깊은 한숨만 푹푹 쉬었다.

 

잠시 후, 가이터가 아이시카에게 물었다.

 

이틀 뒤에 출발이라고?”

 

.”

 

알겠다. 내일 하루는 푹 쉬고, 모레 일찍 가 봐라.”

 

가이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몸 성히 다녀오렴.”

 

수지는 울먹이며 말했고, 아이시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지를 꼭 안아주었다.

 

흐흐흑…….”

 

수지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시카는 그런 수지의 등을 토닥여 주었고, 가이터는 말없이 한숨만 푹푹 쉬었다.

 

다음날 아침. 식사시간이 다 되었음에도 세르가픽이 방에서 나오지 않자 걱정이 된 아이시카가 세르가픽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똑

 

세르가픽. 아직 자?”

 

대답은 없었다. 아이시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열었다.

 

그러자 베게가 날아와서 아이시카의 발치에 떨어졌다.

 

아이시카가 베게를 집어 들고 침대를 바라보았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세르가픽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가!”

 

세르가픽. 어제는…….”

 

나가! 형아가 세상에서 제일 미워! 으아아아앙!”

 

세르가픽이 다시 울음을 터뜨리자 아이시카는 베게를 든 채로 방을 나섰다.

 

세르가픽은?”

 

아이시카까지 오지 않자 둘을 데리러 오던 수지가 물었다.

 

아이시카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베게를 수지에게 건네며 말했다.

 

엄마가 잘 좀 달래줘.”

 

수지가 베게를 받자 아이시카는 주방이 아니라 대문으로 향했다.

 

어디 가니? 밥은?”

 

미안. 생각이 없어.”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나중에 먹을게.”

 

! 아이시카!”

 

뒤에서 수지가 불렀음에도 아이시카는 그냥 집을 나왔다.

 

하지만 갈 곳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결국 아이시카는 가이터와 종종 사냥을 가던 근처의 숲으로 향했다.

 

눈물을 흘리며 비치적거리는 걸음걸이로 어디론가 향하는 아이시카의 모습에 성 안의 사람들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이시카가 말을 걸기 어려운 분위기를 온 몸으로 풍기고 있었기에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성을 벗어나서 숲에 도착한 아이시카는 예전에 가이터와 만들어둔 은신처로 향했다.

 

둘이서만 울창한 나무 위에 만들었기에 아는 사람들은 없었다.

 

낑낑거리며 나무에 오른 아이시카는 은신처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오랫동안 찾지 않아서인지 곳곳이 낡고 썩은데다가 벌레가 득시글거려서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이시카는 은신처를 발로 차서 부숴버린 뒤 떨어뜨려 버렸다.

 

그리고 나서 은신처를 올렸던 곳을 대충 치운 뒤 주저앉았다.

 

형아가 세상에서 제일 미워!’

 

조금 전 세르가픽이 외친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하아…….”

 

-주르륵

 

눈물과 한숨이 계속 흘러나왔다. 한참을 흐느껴 울던 아이시카는 마음이 좀 진정되자 나무에서 내려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아이시카는 힘없는 걸음걸이로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시카가 돌아오자 수지가 부리나케 달려 나오며 물었다.

 

어디를 갔었던 거야?”

 

그냥 좀…….”

 

밥은 먹었고?”

 

아니. 밥은 아직 안 먹었어. 세르가픽은?”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울다가 조금 전에 저녁 먹고 잠들었어.”

 

그래…….”

 

너도 얼른 들어와서 밥 먹어.”

 

.”

 

아이시카는 수지가 끄는 대로 힘없이 따라갔다.

 

거실에 앉아있던 가이터는 돌아온 아이시카를 흘끗 바라보며 물었다.

 

사과는 했냐?”

 

아니. 말도 못 붙였어.”

 

말도 없이 가버릴 작정이냐?”

 

…나중에 화 좀 풀리면 엄마랑 아빠가 이야기 좀 해줘.”

 

그래.

 

그 말을 끝으로 가이터는 입을 다물었다.

 

아이시카는 말없이 주방으로 향했다.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렴. 금방 데워줄 테니까.”

 

수지는 아이시카를 의자에 앉히고 남은 음식들을 데워서 차려주었다.

 

잘먹겠습니다.”

 

아이시카는 힘없는 목소리로 수지에게 인사를 한 뒤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음식의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음식을 입으로 밀어 넣을 뿐이었다.

 

식사가 끝난 뒤, 아이시카는 곧바로 방으로 향했다.

 

이만 자러 갈게.”

 

. 잘 자.”

 

잘 자라.”

 

방으로 향하는 아이시카의 등에 대고 수지와 가이터가 인사를 했다.

 

아이시카는 대꾸는 하지 않고 손만 흔든 뒤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빨리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성으로 가야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결국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아이시카가 길게 하품을 하며 방에서 나왔다.

 

거실에는 빈 병이 잔뜩 굴러다니고 있었고, 수지와 가이터가 소파에 축 늘어져 있었다.

 

아이시카는 옅게 한숨을 쉬고는 둘을 안아서 방으로 데리고 가서 눕혀주었다.

 

그리고 테이블을 대충 정리한 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마중은 없었지만 아이시카는 인사를 한 뒤 성으로 향했다.

 

성에 도착한 아이시카는 입구를 지키는 기사에게 로날드와 함께 전쟁터로 가기 위해서 왔다고 했다.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병사들에게 문을 열라고 시킨 후 말했다.

 

훈련장으로 가 보도록 해라.”

 

. 수고하십시오.”

 

아이시카는 기사에게 인사를 하고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 곳에는 이미 병사들과 기사들이 줄을 맞춰서 서 있었다.

 

아이시카가 어디로 가야하나 싶어서 눈치를 보면서 서 있는데, 로날드가 오라는 손짓을 했다.

 

아이시카는 쭈뼛거리며 로날드에게 다가갔다. 로날드는 반갑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잘 왔다.”

 

저어다른 사람은 안 왔습니까?”

 

네가 첫 번째다.”

 

네에…….”

 

아이시카는 불안한 눈으로 훈련장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 금방 몰려올 거다.”

 

로날드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이시카가 로날드를 슬쩍 바라보자 표정은 자신만만했지만 불안한 눈빛만은 감추지 못했다.

 

해가 중천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렸음에도 아이시카를 제외한 누구도 오지 않았다.

 

흐음……. 아무도 오질 않는구나.”

 

기다리던 데른이 중얼거리자 로날드가 다급히 외쳤다.

 

금방 올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다. 그러니 넌 영지에 남도록…….”

 

-웅성웅성

 

데른이 영지에 남으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훈련장으로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로날드에게 달려가서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소영주님.”

 

그들은 불호령이 떨어질까봐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데 그들의 귀에 들려온 것은 의외로 밝은 로날드의 목소리였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괜찮다. 아버지, 약속대로 영지민들을 모았으니 절 지휘관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모인 영지민들은 척 봐도 100명이 넘었기에 데른은 옅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다. 약속대로 로날드 너를 지휘관으로 임명하겠다.

 

보내기로 했던 병사들과 기사들도 붙여 줄 테니 공을 세우고 우리 가문의 이름을 드높이고 오너라.”

 

알겠습니다. 지금 즉시 출발한다!”

 

로날드는 말에 올라서 의기양양하게 훈련장의 입구로 향했다.

 

그 뒤를 말에 탄 기사들이 따라갔고, 기사들의 뒤로 칼같이 줄을 선 병사들이 따라갔다.

 

영지민들은 쭈뼛거리며 병사들의 뒤를 따랐다. 아이시카는 맨 뒤에서 따라가면서 데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데른이 기다렸다는 듯 슬쩍 로날드를 가리켰고, 아이시카는 슬쩍 고개를 끄덕인 뒤 병사들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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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헨타이망가